세계 4대 성인(聖人), 세계 4대 종교(宗敎)
[1]. 세계 4대 성인
1]. 소크라테스가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이라고 서술하는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소크라테스(기원전 470~기원전 399년)철학의 모든 문제를 평생 동안 토론을 통해 풀었어요.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지요.
욕심 없이 진리만 좇으며 열성과 지혜를 쏟는 그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참지혜와 진리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라고 칭송했어요.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의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물어 응답을 받는 신탁이 이루어졌어요. 이 델포이 신탁이 "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라고 응답했다고 해요.
. 출처: 너 자신을 알라!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 2014.10.20., 가나출판사)
2]. 세계 4대 성인의 공통점과 차이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에 거론된 세계 4대 성인. 이 책은 세계 4대 성인을 예수.공자.석가.소크라테스로 제시하고 있음.
목차
1. 탁월한 제자들, 그리고 고단한 삶
2. 고향과 조국에서 배척을 당하다
탁월한 제자들, 그리고 고단한 삶
예수 · 공자 · 석가 · 소크라테스, 이들 사이에는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활동 기간이다. 예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 석가모니는 기원전 566년에서 기원전 486년,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서 기원전 399년이 생존 연대이고, 다만 예수만 기원전 4~5년에서부터 기원후 30년 무렵까지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을 인류 역사상 가장 정신문화가 발달했던 아주 특이한 시기로 간주하여 이때를 주목한다.
이들 세 성인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제자들이 또한 이 시기에 함께 활동했음을 볼 수 있다. 공자에게는 안연 · 안회 · 자로 · 자장과 같은 제자들이 있었고, 석가모니에게는 열 제자로 불리는 사리불 · 목건연 · 대가엽 · 아리루다 · 수부티 · 부루나 · 가시연 · 우파리 · 라후라 · 아란 등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과 같은 특출한 제자와 크리톤 등이 있었으며, 예수에게는 열두 사도로 일컬어지는 베드로 · 요한 · 야고보 · 안드레 · 빌립 · 도마 · 바돌로매 · 마태 · 야고보 · 시몬 · 유다 · 맛디아 등의 제자가 있었다.
둘째,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출생지를 보면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공자는 중국의 황하 유역을, 석가모니는 인도의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을 대표하며, 예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신하는데, 다만 소크라테스는 이집트의 나일강 대신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출생했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지중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권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셋째, 네 사람의 가정환경을 살펴봤을 때 석가모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난했다. 먼저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이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낳은 아들로,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오랜만에 벼슬자리에 앉아 현실정치를 펴면서도 철저하게 실패했고, 말년에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눈물과 회한 속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결국 사마천은 그가 쓴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 개’라 표현했는데, 이 말은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이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원래 가난한 석수장이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한 데다 직업조차 없었다. 더욱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녁 한 끼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전혀 보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가난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돈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그를 구박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소크라테스와 아내 크산티페어느 날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앞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며 물벼락을 안기자, 그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악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는 결과적으로 철학에 몰두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큰아들로 태어나 역시 아버지가 일찍 운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모친과 많은 동생들의 부양에 대한 책임감으로 잠시 목수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공생애라 일컬어지는 기간을 포함하여 그의 삶 전체가 고난의 역사였기에,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경험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사촌 요한에게 부탁해야만 했던 상황은 그의 절박한 심정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석가모니는 인도의 카필라에서 성주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적에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나, 결국 출가함으로써 곤고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고향과 조국에서 배척을 당하다
넷째, 이들 네 사람은 조국과 고향에서 배척을 당했다. 공자는 자신의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이나 외국(중국 안의 다른 나라들)을 떠돌아다녀야 했고, 말년까지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1919년 5 · 4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한때 공자를 비판하는 시대마저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였다. 불교는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그 교세가 성장했지만, 정작 교조 석가모니가 태어난 인도에서는 지금도 불교 대신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또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부터 야심적인 정치가들에게 계속 미움을 받았고, 결국 동족인 아테네 시민들의 고소와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해야 했다.
예수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제사장 · 바리새인 · 유대파 장로)에게 핍박을 받고, 결국 그들의 고소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를 죽이라고 소리 높이 외친 사람들은 동족들이었다는 뜻이다. 이를 빌미로 히틀러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그의 선동에 도취된 당시 독일인들은 거의 미친 듯이 이에 동참했다.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해야 했던 가톨릭의 교황청에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최근 들어 “예수님 역시 유대인이었다.”라는 요지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지난날의 피 어린 역사가 지워질 리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도 예수의 조국 이스라엘에서는 그를 메시아(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곳 국민들은 여전히 초림(初臨)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독교 대신 전통적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다.
다섯째, 이들 네 사람의 용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공자에 대한 묘사는 차라리 전설처럼 들린다.
“그의 눈은 크고 길며, 이마는 앞으로 높게 나와 황제(黃帝)의 모습이요, 팔은 길고, 등은 거북의 모양이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로 크다. 몸 둘레는 아홉 아름이나 되고, 앉으면 용이 서린 것 같으며, 일어서면 견우성을 대하는 것 같다.”
석가모니 역시 지금의 불상을 보건대, 상당히 원만한 풍모가 아니었나 싶다. 한편 소크라테스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크고 둥근 얼굴에 벗겨진 이마, 툭 불거진 눈,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땅딸막한 키, 불거진 배,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걸음 등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추남에 가까웠다.
예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키도 작고 몸도 약했으며, 얼굴 역시 그리 잘난 편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뜻인데, 그는 가난했고 그다지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록 키가 작고 몸이 약했으나 얼굴만큼은 그런 대로 잘생겼다는 설이 있다.
여섯째, 공자를 제외한 세 성인에게는 저서가 없다. 모두 제자들에 의해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고 봐야 하겠는데, 가령 《대화록》에 나오는 모든 저작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 소크라테스 자신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 역시 사정은 같으며, 예수도 책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령 예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복음서(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만 해도 그의 말과 행동에 관한 기록일 뿐, 그가 스스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예수가 썼다거나 불경을 석가모니가 썼다는 식의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다만 공자만 예외여서 그가 직접 쓴 책으로 《역경》 《시경》 《서경》이 있으며, 여기에 《춘추사기》 《예기》를 합쳐 오경(五經)이라 부른다. 흔히 말하는 《논어》 《대학》 《중용》 《맹자》 등 이른바 사서(四書)는 그 이후에 나온 책들이다.
보리수 아래의 붓다보리수 아래에 합장한 채 앉아서 명상에 잠긴 붓다의 모습이다.
일곱째,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네 성인의 가르침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공자는 어질 인(仁)을, 석가모니는 자비를,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뜻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에서 강조하는 오계는 기독교의 십계명 가운데에 그 내용이 다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살인 · 간음 · 도적질 · 거짓말 등은 동서고금의 모든 윤리학에서 공통적으로 금지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여덟째, 마지막으로 죽음의 형태를 살펴보자면, 동양의 두 성인과 서양의 두 성인이 매우 대조적이다. 먼저 공자와 석가모니는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자연사한 데 반해,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제명을 누리지 못한 채 사형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잔을 마셨고,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 죽음의 형태들을 놓고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즉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한 폭의 동양화에서 볼 수 있듯 동양 문화가 자연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 데 반해, 로마의 수많은 분수대가 상징하듯 서양 문화는 늘 자연을 거슬러 거꾸로 흐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 출처: 세계 4대 성인의 공통점과 차이점(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2009. 1. 30., 평단문화사)
[2]. 세계 종교 유교와 세계 4대 종교
1]. 세계종교 유교.
1. 다시 되짚어보는 전통 유교국들의 역사
1). 중국.한국.베트남같은 전통 유교국의 대학제도
가. 중국의 경우 한나라 태학.국자감.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변함.
나. 한국은 고구려 태학.신라 국학.고려 국자감(고려말 성균관이 됨).조선 성균관(2차대전 이후 해방후 미군정기 성균관대로 정통승계되어 오늘에 이름)
다. 베트남의 국자감. 공자님을 모시고, 베트남 최초 대학인 문묘국자감에서 이루어진 유교교육이나 통치이념인 유교,그리고 진사(進士)배출등
하노이에 있는 ‘반 미에우 꾸옥 뜨 잠(Văn miếu Quốc tử giám, 문묘국자감(文廟國子監))’ 사적은 11세기에 세워졌으며 유교 및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기원전 551~479)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의 다른 나라들처럼 베트남의 왕들은 유교를 받아들여 국가를 건설하였고 유교를 사회적·정치적 기초로 삼았다. 특히 15세기 이후에는 유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반 미에우 꾸옥 뜨 잠’은 베트남 조정에서 일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관료들을 훈련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천 명의 띠엔 시(進士)를 배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이곳을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 여기고 있다.
. 출처:레 왕조와 막왕조(1442~1779)의 과거 시험 관련 석판기록[Stone Stele Records of Royal Examinations of the Le and Mac Dynasties (1442-177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2). 한나라이후 세계종교 유교의 문화를 가져온 나라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한국.베트남.몽고등입니다.
가. 세계사의 正史 개념으로 보면, 제자백가이후,漢나라때 국교로 성립된 유교는,이후 동아시아의 주요이념으로 세계종교화. 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걸쳐,유교명절 전해짐.한국은 수천년 유교국가의 길을 걸어온것에 해당.http://blog.daum.net/macmaca/2313
나.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중등 역사 / 중고등학생 공부방
중등역사
7단원 통일제국의 형성과 세계 종교의 등장
1. 고대 중국의 통일과 유교의 성립
1) 춘추 전국 시대
① 시기 : 주의 동천부터 진에 의한 중국 통일까지의 시대
(기원전 770 ~ 기원전 221 )
② 정치 : 주 왕실의 약화 → 봉건제 붕괴 → 제후들의 독립과 세력 다툼
(춘추 5패, 전국 7웅)
③ 사회 ․ 경제 : 철기의 보급
* 철제 농기구 사용 → 농업 생산력 증가 → 상공업 발전 → 시장, 화폐, 도시
* 철제 무기 사용 → 전투력 향상 → 정복 전쟁 활발
④ 제자백가의 출현
* 부국강병을 위해 각국이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 다양한 사상 출현
* 유가 : 공자, 맹자 → 인, 예 강조, 도덕 정치
* 도가 : 노자, 장자 → 무위자연
* 법가 : 한비자, 상앙 → 엄격한 법에 의한 통치 → 진의 통일에 기여
2)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秦)
① 시황제의 통일 정책
* 정치 : ‘황제’ 칭호 사용 →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 (중앙집권 통치)
군현제 실시 → 지방관 파견
* 사상 : 법가 사상 채택, 분서갱유 (사상 탄압, 유가 사상가 생매장)
* 사회 ․ 경제 : 화폐, 도량형, 문자 통일
* 만리장성 축조 : 흉노 침입 대비
② 멸망 : 지나친 토목 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와 가혹한 통치
→ 진승 ․ 오광의 난으로 멸망 (기원전 206)
3) 한(漢)의 발전과 유교 사회의 형성
① 한의 유방(한 고조)이 항우를 물리치고 수립, 장안에 도읍 (기원전202)
② 한의 성장과 발전
* 고조의 정치
- 군국제 실시 : 중앙은 군현제, 지방은 봉건제로 다스림
* 무제의 정치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군현제의 전국적 실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
- 영토 확장 : 베트남, 흉노, 고조선 정복
- 국가 재정 강화 : 소금, 철 전매제도
- 비단길 개척 : 흉노 격퇴를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함, 대월지와의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비단길(실크로드)이 개척됨
③ 신(新) (8~23) : 한 무제 이후 외척인 왕망이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건국
④ 후한 (25~220)
* 건국 : 왕망에게 빼앗겼던 한을 광무제(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킴
* 쇠퇴 : 환관과 외척의 횡포 극심 → 농민 생활의 어려움
→ 황건적의 난 + 지방 호족들의 자립 → 위 ․ 촉 ․ 오 삼국으로 분열
⑤ 한의 경제 : 농업 생산력 증대, 수공업 발달 (질 좋은 비단, 칠기, 옥제품 생산)
⑥ 한의 사회와 문화
* 사회 : 호족 중심 사회 → 향촌 질서 유지, 교육 담당, 대토지 소유, 관리로 진출
* 문화 : 중국 전통 문화의 기틀 마련
- 한자 정리 : 오늘날의 형태로 정리됨
- 역사학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반고의 ‘한서’
- 지동의 발명 : 후한 때 장형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지진 관측 기구
- 종이 발명 : 후한 때 채륜이 제지법 개량 → 학문과 사상의 발달 촉진
- 불교 전래 : 후한 대에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됨
⑦ 유교의 발전과 확산
* 유교의 국교화 : 한 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삼음
- 유학 교육 장려 : 수도에 태학 설치, 지방에 오경박사 파견 → 인재 양성
- 유학의 생활화 : 학문의 중심, 관리 선발과 일상생활의 기준이 됨
- 유학의 주요 경전 :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 훈고학의 발전 : 유교 경전의 정리와 해석을 중시함
* 유교의 확산 : 동아시아 국가에서 정치생활과 사회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