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丙子胡亂 다시 보기) 대한문학세계 기자, 소운/박목철
이북을 고향으로 둔 사람은 명절이라고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게 마련이다.
특히 올해같이 긴 연휴 기간에는 연휴가 반갑다기보다는 무엇을 하고 보내나? 하는 걱정이
앞서게 마련이다. -남한산성- 양평읍에 가는 길에 극장에 붙어있던 영화 간판이 문득 떠올랐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웬만한 역사물은 거의 놓치지 않고 봐 왔던 터라 민족사에 가장 치욕적
사건이랄 수도 있는 병자호란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렸을까 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남한산성 영화를 보며, 이런 영화를 만들고 또 봐 줄 관객이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
몇 장면의 작은 전투를 빼고 나면 대부분이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대표 되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에 곤혹스러워하는 인조 등, 당시 조선이 처한 어려움을 그리는 데 초점이 있어 다소
답답하게 흐를 수도 있는 내용을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남한산성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는 후한 평을 해 주고 싶다는 게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다.
역사를 통하여 전투에 패한 적은 있지만, 전쟁에 패해 왕이 항복한 일은 병자호란이 유일하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당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임진왜란에 휘말린 명은 국력이 쇠진해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후금(청)을 제압할 힘을 잃었고
조선은 7년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던 때라 전쟁을 치를 능력이 부족했다.
그나마 분조를 이끌며 전쟁을 치러본 광해군은 대륙의 정세에 밝아 명과 청 사이에 교묘한 처신
으로 전쟁의 불똥이 조선으로 번지는 것을 잘 막고 있었다.
명의 거듭된 강요 때문에 원군을 파병하면서 강홍립에게 내린 밀지가 觀形向背(형편을 살펴 처신)
로 이미 명의 운이 다했음을 안 강홍립은 청에 투항하여 누르하치에게 광해의 뜻을 알렸다.
인조반정이 성공하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 청에 투항한 강홍립은 졸지에 역적이 되어 가족이
투옥되는 변을 당하고, 정묘호란 때는 청군과 함께 조선에 출병할 수밖에 없었지만 조선을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다행히 정묘호란은 청과 원만한 타협으로 전쟁 준비할 시간은 벌었으나 대책 없이
입만으로 반청(反淸)을 외치다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게 인조와 당시의 조정이었다.
청은 처음부터 전투를 피해 한양으로 진격해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내려 했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조선을 침공한 청의 기마 부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수항단에서
청나라 왕에게 三拜九叩頭禮의 치욕스러운 항복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가 남한산성이다.
* 남한산성 남문 쪽에서 바라본 성의 모습, 산 정상에 성벽이 있다. 난공불락의 지형이나 포위될 경우 고립될 우려도 보였다.
* 성벽은 지형적 이점을 잘 이용해 공성이 쉽지 않아 보였다. 반대로 성을 에워싸면 감시를 벗어나기 어렵고 탈출로가 마땅치 않다.
영화에는 척화파의 주장이 대세이고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의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 전에는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의 하나가 어버이의
나라인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과 친교를 맺은 것은 광해군의 중요 잘못이었기에,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와 공신의 입장에서 청과 화친은 곧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을 잃는 행위였다.
하지만 강화도로의 피난길이 막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는 신하들의 처지가 달랐을 것이다.
여건이 나쁜 산성에 추위와 식량부족에 더해 성이 함락당하면 닥칠 죽음의 공포가 컸을 것이고
항복을 하면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고생을 면한다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고, 스스로 불러들인 참화였다.
청이 침범은 갑자기 당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나라 사신을 인조는 만나 주지도 않았고, 전국에 교지를 내려 전쟁준비를 하도록 독려하고
청의 사신이 머무는 객사 앞에는 사신을 처형하고 청을 징벌하라는 지금으로 치면 촛불 부대가
아우성을 치고 있어 위협을 느낀 청의 사신이 도주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선전 포고를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안타까운 것은 전쟁이 발발하자 청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이 항복을 한 점이다. 정규군의 지휘권을 가진 김자점은 적극적으로
나서기는커녕 당시의 명장이라던 임경업의 발까지 묶어 버렸다.
더욱이 운이 없었던 것은 인조반정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도 변방으로 밀려났던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패하며 강력한 북변의 군사가 궤멸한 점이다. 이후, 반란의 우려 때문에
제대로 군사 훈련을 시키기도 어려운 분위기 탓에 지금으로 치면 1군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반정 공신이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 광해를 쫓아내며 내 건 尊明 반청의 구호 탓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라를 지킬 인재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임진왜란 때는 임금이 덜 현명했지만 신하는 인재가 많았으나 병자호란 때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 3대 간신의 한 명인 김자점에게 군사를 맡긴 것도 그가 반정공신이기 때문이다.
(실제 반정의 공을 따지면 이괄 이 으뜸이다. 거사 계획이 누설됐다고 다들 숨었을 때 이괄 이
나서서 반군을 이끌어 반정을 성공하게 했으나, 김자점 등의 모함으로 결국 난을 일으켰다)
싸우겠다고 하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점도 안타깝다.
청은 전투를 피해 속전속결로 왕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인조는 전혀 적의 작전을 알지 못했다.
북방민족은 육전에는 강하나 수전에 약한 점을 노려 항상 전란이 나면 강화도로 왕이 피신했다.
강화도는 토지도 비옥하고 수군이 없는 북방 민족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만했다.
청나라는 중국의 수군을 징발해 강화도 공략에 나섰고 결국 강화도는 청나라군에 함락돼 왕자를
비롯해 왕실 가족이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의 사기가 더욱 꺾였다.
(강화 수비도 반정공신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맡아 술판이나 벌이고 수비를 게을리하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달아났다가 후일 사약을 받아 죽었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은 폭약을 터트려 자결했다)
* 남한산성 서문이다. 인조가 항복 하러 나간 문이다. 성문이 상당히 낮다. 청은 왕의 옷을 벗고 이문으로 나오게 했다.
* 서문은 성인이 서면 약간의 여유가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고 폭이 좁다. 청은 인조를 이 문으로 나오게 해 기를 죽인 셈이다.
* 남한산성 남문이다. 상대적으로 성문이 높고 크다.
경상, 충정, 전라의 군사가 집결하여 남한산성의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지휘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탓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참패했다. 4만여의 군사가 집결하여 조총으로 적을 공격하려
하다가 개인에게 나눠 준 화약의 양이 적어 적이 닥치기도 전에 화약이 떨어졌고, 당황한 병사들은
다투어 한꺼번에 탄약을 받으러 몰렸다고 불이 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를 당했다.
빈 막대기나 다름없는 소총으로 기마병을 적대하지 못해 청의 기병 3백 에게 4만 명 이상의 군대가
박살 나는 세계 전쟁사의 기록을 남겼으니 이름하여 쌍령(경기 광주시에서 동으로 16km) 전투라 한다.
이러니 머저리 왕이 아니라 해도 강화도가 함락되고, 삼남 군사는 대패해 흩어진 상항에서,
엄동설한에 식량까지 바닥이 나니 더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최명길이 적장에게 구걸해 항복의 예도 삼배구고두례로 항복의 격을 낮춘 것이다.
최악의 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옥구슬을 물고, 관을 메고 적장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왕이 항복했으니, 하기에 따라서는 모진 처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청 태종은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지난날의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는 것, 아마도 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탓에 조선이 마음으로
복종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강화도 점령 시에도 왕족은 하나도 해치지 말라는 청 태종의 엄명이
있었다고 한다.
* 남한산성은 지형이 높고 조망이 좋아 주변을 감시하기에는 좋지만, 적의 입장에서는 포위하기 좋은 성이기도 하다. 북한산성이 당시에는 구비 되지 않았지만, 북한산성이었다면? 산성으로 들지 말고 남쪽으로 피신했다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 성의 암문이다. 적은 눈을 피해 드나들며 정탐하거나 식량을 반입하는 비밀 문이다.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었다.
* 암문은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눈에 안 띄게 만든 작은 출입구이다. 이 암문은 어른 한 명이 드나들 정도,
영화에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그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는 기록영화가 아니라면 영화일 뿐이다.
김상헌은 정작 살아남아 그 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장수(82세) 하며 벼슬도 했다.
오히려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는 척화 주모자로 심양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참형을 당하였으나, 김상헌은 심문을 받고 석방되어 풀려났다.
(일설로는 최명길과 심양 감옥에 같이 갇혀 있으며 서로 간에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한다)
삼학사는 후일 충신으로 추존되어 시호를 받았고, 우리는 충절을 기리는 교육을 받았다.
어느 고위 정치인 한 분이 지금의 시국에 빗대 척화파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새겨야 할 것이 있다.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을 끝내고 자리를 보존한 것은 왕과
신료들뿐이었지, 백성들은 고초를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전쟁 포로를 수십 만(오십 만이라고도 함) 명 끌고 가 노예 시장에서 사고팔며 학대했다.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면, 오히려 왕과 집권층은 참화를 입었겠지만 백성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굴욕적 평화는 지배층을 기득권은 지켜냈지만, 백성들의 삶은 지키지 못했다.
역사상 처음 당한 치욕적 패배에 따른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지금도 전쟁의 상처는 가시지 않고 우리의 언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환향녀-청에 잡혀갔다 속환된 여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부도덕한 여자로 간주 낮추어 불렀고,
이 말이 지금도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를 화냥*이라고 부르고 있다.
호래자식- 청에 끌려갔다 속환된 부녀자 중에는 임신한 체 귀향한 예가 많았다.
이들이 낳은 자식은 오랑캐의 자식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하였고 이를 호래자식이라고 한다.
*남한산성 장대(지휘소)중 현존하는 장대, 원래 단층으로 서장대라 하던 것을 유수 이기진이 2층으로 증축하고 수어장대라 했다.
*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한양을 대신 할 임시 피난처로 쓰려고 마련한 궁궐로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다.
* 무망루, 병자년의 수치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친필로 쓴 편액 원래 수어장대 이 층 누각 안에 있었다.
* 청량당, 남한산성 동남쪽의 축성을 담당했던 이회 장군이 누명을 쓰고 죽자 부인 송씨가 따라 강에 투신했다.
후일 이회 장군이 담당한 쪽의 성벽이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자 그 혼을 위로하는 청량당을 지음, 문이 잠겨 있었다.
조선인들은 잡혀간 피붙이를 속환해 오기 위해 돈을 모으고 전답을 팔아 속환전을 장만했다.
당시 잡혀간 부녀자 중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삼전도(지금의 송파)에서 머리를 언 땅에
찧으며 조아린 탓에 왕과 신료들은 한양으로 복귀했다. 복귀하는 왕을 향해 만주로 끌려가는 백성의
통곡과 애원에 인조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하고 오랑캐의 첩이 된 부녀자는 오랑캐 본처의 모진 학대에 희생이 많았다고 한다.
끓는 물을 **에 부어 죽이기까지 했다니, 보다 못한 황제가 학대를 금지하는 칙서를 내리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 두 인물 강홍립과 임경업을 생각해 보았다.
명을 도우러 파병됐다가 청에 투항한 강홍립, 청을 도우러 갔다가 명에 투항한 임경업,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지만, 나라의 힘이 없으니 외세에 의존하려 했고, 섬기는 나라가 달랐다.
지금도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만만치 않다. 다만, 청 대신에 북의 김정은이 위협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우리의 처지는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의 곤혹스러운 지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한산성, 영화를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역사는 반복이라는데, 나라 앞날이 걱정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 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어수선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으로 압송되며 지은 김상헌의 시조,
* 남한산성 영화 얘기보다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는 생각에서 쓴 글입니다.
영화에는 이런 얘기들이 없습니다. 글을 읽으시고 나면, 이해가 훨씬 쉬우실 겁니다. 많은 역사적
사실을 짧게 쓰려니 쉽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으나, 그냥 글로 봐 주시면 합니다.
*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그래도 우리는 먹어야 산다는 현실에 살고있다.
* 신나는 농악이 흥을 돋우고 있다. 역사적 아픔을 달래는 진혼이라고 좋게 생각했다.
* 표지에 사용한 사진 외에는 연휴 기간 직접 현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길이 막혀 어렵게 남한산성을 찾았습니다. 남한산성 영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