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3월 1일 -1949년 4월 4일 )
구례 기습작전에서 실패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인혁당' 반란군은 산을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 동안 정부에 계속 저항했습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 항전으로 결정하고,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습니다.일부는 노고단 반야산 ( 盤若山 )을 경유하여 백운산(고지,해발1215m) 근거지를 설정하였고, 일부는 태선봉, 둔철산(812m), 정수산(841m) 감악산(951m) 일대에, 나머지는 달궁, 장악산(1237m), 덕유산(1508m), 천마산(658m),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분산하고 유격지를 설정하였습니다.
'인혁당' 반란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광공서 습격, 방화,약탈,살해,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하므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 지역의 양민으로 하여금,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하였습니다. 밤이면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기습하여 곡식과 짐승을 약탈해 가고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갔습니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육본에서는 1949년 3월 1일에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의 병력을 강화하여, 사령관으로 원용덕(元容德) 준장과 정일권(丁一權 ) 준장을 각각 임명하였습니다. 이들은 공비의 출몰을 엄중히 경계하면서 각처에 포위망을 펴고 그들이 섬멸될 정도로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비들도 이에 굴하지 않고 여전히 지리산을 중심으로 각 지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아군에게 산발적인 공격을 거듭하였습니다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인혁당' 반란군 소탕작전을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했습니다. 제1단계 작전: 사령부는 3월 초순 작전부대를 남원.구례.화개장 하동.진주,산청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 1주일에 걸쳐 수색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산악지역의 추위를 피하거나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야산 지대로 하산한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쫓아 올리는데 목적을 두고,
야산 주변의 수색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제1단계 작전 : 사령부는 3월 초순 작전부대를 남원' 구례' 화개장'하동' 진주' 산청'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 1주일에 걸쳐 수색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제1단계 작전기간 중에는 소규모의 접전밖에 없었지만, 화개장 전투에서 제 9연대 제 3연대가 김지휘 부대로부터 기습을 받아 만은 패해를 입었습니다.
제2단계 작전 : 3월 11일부터 전개한 작전으로, 야산지대에 산재한 반란군을 지리산 일대로 몰아넣은 다음 격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전부대는 노고단'반야봉' 천왕봉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 능선의 남과 북을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반란군의 은거지를 버리고 분산하여 함양' 안의' 거창' 지역으로 도주하였습니다. 토벌부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북상하였으나 접촉하지 못한 채 작전을 종결짓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