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네이처>에 특이한 동물 실험 결과가 하나 실렸다. 영장류 연구학자인 사라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프란스 드발(Frans B. M. de Waal)이 실시한 『동물의 행동, 카푸친 원숭이의 정당한 거절』이라는 제목의 실험이었다.
실험 내용은 이렇다. 연구팀은 카푸친 원숭이(꼬리감기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화강암을 주워오면, 보상으로 오이를 주는 훈련을 반복했다. 원숭이들은 신이 나서 이 교환에 참가했다. 실험 결과 원숭이의 95%가 돌과 오이를 바꿔갔다.
어느 정도 훈련이 된 후 연구팀은 한 가지 속임수를 사용했다. 원숭이 한 마리에게만 화강암의 대가로 오이가 아니라 오이보다 훨씬 맛이 좋은 포도를 내어 준 것이다. 이 불공평한 처사에 원숭이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적지 않은 원숭이들이 돌과 오이의 교환을 중단하고 저항을 시작했다. 원숭이의 40%가 아예 교환을 멈췄다.
연구팀은 불평등의 정도를 더 높였다. 이번에는 한 마리의 원숭이에게 아예 화강암을 가져오지 않아도 무조건 포도를 선사한 것이다. 더 극심해진 불공정에 대해 원숭이들의 저항은 더 거칠어졌다. 화강암과 오이의 교환 비율은 20%로 떨어졌고, 일부 원숭이들은 집었던 돌을 우리를 향해 투척(!)함으로써 격렬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대해 공동 연구자인 드발은 “불평등과 부당한 분배에 저항하는 것은 영장류의 본능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오랫동안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가르쳐 왔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정의되는 이 ‘경제학적 인간’에게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나 정의감 따위는 없어야 한다. 오로지 이익만 되면, 경제학적 인간은 무조건 그 일을 선택한다고 경제학은 가르쳤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인간은 몰라도 적어도 원숭이는 그렇지 않았다. 카푸친 원숭이들은 오이를 포기하면서까지 불평등에 저항한 것이다. 드발의 이야기대로 만약 “불평등과 부당한 분배에 저항하는 것은 영장류의 본능”이라면,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이 정의로운 본능을 억누르라고 가르쳐왔던 셈이다.
100년 남짓한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벌 총수들의 범죄를 눈감아 주자”는 것이었다. 횡령 전과 2범의 최태원은 가중처벌이 아니라 광복절 사면의 혜택을 받았다. 삼성 이건희, 현대차 정몽구 등 수백~수천 억 원을 비자금으로 가로챈 경제사범들도 모두 불구속의 특혜를 누렸다.
횡령 사범인 CJ 이재현 회장은 “살고 싶습니다!”라는 절박한 연기 덕에 형기의 4분의 1도 채우지 않고 사면을 받았다. 물론 그는 출소하자마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이 모든 황당한 특혜를 “경제를 살려야 하니까”라는 설득력 하나도 없는 이유를 들먹이며 용인했다.
브로스넌과 드발의 연구는 자본주의가 평등과 정의라는 영장류의 본능을, 원숭이조차 잃지 않았던 그 본성을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박탈해 왔는지를 상기시킨다. 고작 60억 원을 증여받아 그 돈을 8조 원으로 불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까지 떵떵거리며 경영자 행세를 한 것이 분명한 증거다.
돌을 집어오면 오이나 받아오는 민중들과 달리 이재용은 돌도 집어오지 않고 포도, 바나나, 멜론, 수박이 가득 든 과일바구니를 챙겼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우리 서민들과 다른 귀족이어서? 그런 이유로 이재용이 공짜 과일바구니를 받는 일을 용인한다면 우리 사회가 꼬리감기 원숭이의 사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원숭이들도 하는 그 일, 즉 이 불공정에 맞서 돌을 던지는 일을 해야 한다. 불공정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25일 이재용의 재판 결과가 나온다. 우리가 원숭이보다 못한 존재인지, 아니면 최소한 공정이라는 영장류 본능 정도는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가 이날 판가름이 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최소한 원숭이들이 지켜온 사회보다는 더 나아야 할 것 아닌가?